고운실 칼럼니스트
KENPEI - KENPEI's photo 사진=위키피디아 GFDL,Creative Commons Attribution ShareAlike 2.1 Japan License
사무실 앞 초등학교에서는 오후가 되면 아이들의 맑고 경쾌한 조잘거림이 바람을 타고 스며든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곧게 펴고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소나무 아래 짙푸르고 윤기 나는 잎 사이로 우아하게 꽃대를 올리려는 맥문동이 한 송이씩 고개를 든다. 여린 듯 단단한 그 꽃대는 길가의 작은 정원 속에서 자연이 건네는 은밀한 인사 같다. 잠시 바라보다 보면 눈의 피로가 풀리고, 오래된 기억이 잔물결처럼 번진다.
어릴 적, 여름이 저물어 가는 계절이면 밭에서 돌아오시던 어머니 손에는 풀잎과 흙냄새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그중에는 뿌리 끝이 통통한 맥문동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맑은 물에 여러 번 헹궈 은근한 불에 오래 달여 향긋하고 은은한 단맛이 우러나는 차로 끓였다. 목이 마르고 기침이 잦던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차 한 잔이 집안을 포근하게 감쌌다. 이제는 함께 마실 수 없는 시간이 흘렀지만, 맥문동 향을 맡으면 밭일로 검게 그을린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와, 그 부지런함을 닮아 땀을 흘리는 남동생의 모습이 겹쳐진다.
■ 목마른 아이를 살린 ‘아이의 풀’
맥문동은 우리나라 남부와 중국, 일본 등지에 자생하며, 한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이다. 옛 전남의 한 마을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늘 목이 마르고 기침이 잦던 한 소녀가 시골길을 걷다 풀숲 속 뿌리를 씹었는데, 신기하게도 갈증이 사라지고 기침이 멎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 풀을 ‘아이의 풀’이라 불렀다. 바로 맥문동이었다. 민간 약초꾼들은 장마철, 풀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보랏빛 맥문동 꽃대를 발견하면 “올해도 폐와 목을 지켜줄 약초가 무사히 자랐다”고 했다. 병원과 약이 귀했던 시절, 이 풀은 기침과 갈증으로 고생하던 아이들과 노인들의 숨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맥문동(麥門冬)은 ‘보리(麥)가 여문 뒤에도 겨울(冬)까지 살아 있는 풀’이라는 뜻으로,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간직하는 강인함을 상징한다. 중국 『신농본초경』에는 폐를 윤택하게 하고 갈증을 멎게 하는 약초로 기록돼 있으며, 옛 문헌에서는 ‘촌동(寸冬)’, ‘양수(羊鬚)’ 등으로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에 기침·갈증·폐열 치료에 쓰였고, 민간에서는 ‘아이풀’, ‘보릿골풀’로도 불렸다. 또 ‘맥’을 ‘혈맥(脈)’으로 풀어 ‘맥을 잇는 풀’이라 하여 생명의 흐름을 지켜준다는 믿음도 전해진다.
꽃이 진 뒤에도 가을까지 푸른 잎을 간직하며,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그 강인함 때문에 ‘작은 약국’이라 불리며 귀하게 쓰였다.
맥문동은 7월 말에서 8월 중순 사이, 여름의 숨결이 서서히 가을로 이어지는 시기에 보랏빛 꽃을 피운다. 땅속 깊은 뿌리에 깃든 힘과 효능은 인삼과 도라지에 견줄 만큼 사포닌이 풍부하다. 특히 ‘스피카토사이드-A’ 성분은 염증 완화와 암세포 성장 억제에 도움을 준다. 전통적으로 폐와 위를 촉촉하게 하고 기(氣)를 보충하며, 갈증 해소, 혈당·혈압 조절, 해열·자양 강장 등 폭넓은 효능으로 사랑받아 왔다.
■ 치유레시피 ‘폐를 다스리는 맥문동죽’
[재료] (2~3인분 기준)
맥문동 뿌리 20~30g (건조 상태), 쌀 1컵 (200ml), 물 약 1.5리터
기호에 따라 대추 2~3개, 배 슬라이스, 약간의 꿀 또는 소금
[만드는 법]
•건조 맥문동은 흐르는 물에 여러 번 깨끗이 헹구고, 생맥문동일 경우 뿌리의 털과 흙을 칫솔이나 작은 솔로 제거한다.
•맑은 물에 넣어 30분간 푹 달인 뒤 건더기는 건져내고, 우린 물에 쌀을 넣고 중약불에서 30~40분 은근히 끓인다.
•끓는 중간에 대추나 배를 넣으면 단맛과 향이 깊어진다.
•쌀이 퍼져 걸쭉해지면 불을 끄고, 기호에 따라 소금이나 꿀을 더한다. 뜨겁게 먹어도 좋고, 미지근하게 식혀도 부드럽다.
tip)
■ 기관지 강화용 : 도라지 5~10g을 맥문동과 함께 달이면 기침 완화 효과가 배가된다.
■ 갈증 해소용 : 배와 은행을 함께 넣으면 수분 보충과 함께 은은한 단맛이 난다.
■ 기력 회복용 : 찹쌀을 일부 섞어 끓이면 보양식 효과가 높아진다.
■ 겨울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맥
에머슨은 “자연은 한 송이 꽃 속에 우주의 모든 지혜를 담았다”고 했다. 맥문동의 꽃대를 바라보면 그 말이 실감난다.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잃지 않고, 여름 끝자락 햇살 속에서 피어나는 맥문동은 산책나온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겉은 잠시 사라져도, 본질의 힘은 땅속에서 계속 자란다.”
“견디고, 피어나고, 다시 숨을 고르라.”
걸음을 멈추고 땅의 식물과 잠시 눈 마주쳐 웃고, 깊이 호흡하고, 지친 폐와 메마른 마음을 동시에 치유하고, 그 순간 나는 자연이 건네는 잔잔한 말을 들으며, 사무실로 천천히 돌아왔다. 그리고 길가의 작은 위로가 모두에게 전해 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