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실 칼럼니스트
은빛 살에 스민 바다와 추억-갈치. 이미지=미리캔버스
갈치는 치매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유일하게 드시던 생선이다. 올케는 그런 어머니에게 거의 매일 갈치를 구워 가시를 발라내며 어머니 옆을 지켰다. 마치 잊힌 기억 속에서 작은 불씨가 되살아 오기라도 하듯 잊혀지는 어머니 기억의 지우개를 바라보며 먹는 특별한 생선이었다.
해수면 온도가 오르며 갈치어군이 귀해졌다는 요즘, 제주도에 사는 어부 친구는 점점 사라져가는 생선을 걱정하며 오랜만에 오름 오르자고 모인 친구들을 불러 앉혀 한참 웅변을 한다. "옛날엔 바다에 뜨기만 해도 한 상자였는데 요즘은 그 그림자도 귀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친구의 모습에, 우린 잠시 웃었지만, 이내 숙연해졌다. 어획량 감소보다 무서운 건, 식탁 위에서 사라지는 바다의 계절감이 아닐까 싶다.
갈치는 누구나 한 번쯤은 먹어본, 서민의 밥상 위에서 가장 친근한 생선이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길고 매끄러운 몸 때문에 예전에는 ‘칼치’라고도 불렀다. ‘칼’의 옛말 ‘갏’에 접미사 ‘-치’가 붙어 ‘갈치’가 되었다는 언어학적 해석도 있지만, 사실 갈치는 이름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맛’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나 역시 갈치와 얽힌 추억이 많다. 유독 손자손녀를 예뻐하던 우리 할머니는 식탁 위 갈치를 다 발라 먹고 난 뒤, 남은 살점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집어 드셨다. 그리고는 은빛 비늘이 묻은 손가락을 수건에 슥슥 닦으며 “참 고소하다” 하고 웃곤 하셨다. 아마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지저분한 꼰대의 이야기’라고 웃어넘길지도 모르지만, 내겐 그 모습이야말로 60년대의 부엌 풍경, 그 시절의 정(情)이었다.
■ 은빛 생선의 전설 – 갈치 이야기
갈치는 제주 바다와 남도의 부엌을 오가며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생선이다. 제주에서는 바람이 거칠게 불던 날, 어민들이 바다를 달래기 위해 갈치를 구워 신에게 기도하던 풍습이 있었다. 남도에서는 며느리가 시집와서 처음 배우는 생선요리가 바로 갈치조림이었고, 뼈가 부드러워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어 ‘온 가족 생선’이라 불렸다. 오늘 저녁 식탁에 갈치를 올린다는 건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차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제주에는 오래된 전설도 전해진다. 옛날 한 바닷마을의 어부가 바다에 기도를 올리자, 하얀 옷을 입은 여신이 나타났다. 여신은 “네가 부지런히 그물을 던지면, 은빛 물결이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다”라고 말했고, 다음 날 어부의 그물에는 눈부신 은비늘을 가진 생선이 가득 담겼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갈치’라 부르는 생선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갈치를 ‘은갈치’라 부르며, 심지어 ‘은빛 복魚’라고도 불렀다.
예부터 갈치는 제사상에 올리는 귀한 생선이었고, 신혼집 첫 상에도 갈치를 올리면 “은빛 같은 복이 온다”는 속담이 있었다. 제주 사람들은 특히 겨울철 갈치를 “추운 계절에도 기운을 잃지 않게 해주는 바다의 약”이라 불렀다. 갈치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말 그대로 자연이 준 ‘보약’이었다.
갈치는 이름도 다양하다. 어획 방식과 신선도에 따라 은갈치, 풀치, 산갈치, 먹갈치 등으로 나뉜다. 《자산어보》에서는 ‘군대어(裙帶魚)’라 기록되어 있는데, ‘치맛자락처럼 길게 늘어진 물고기’라는 뜻이다. 또 ‘갈치어(葛峙魚)’라는 속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름만큼이나 생김새도 특별하다.
갈치는 마치 은빛 리본처럼 길고 가늘며, 옆으로 납작해 바닷속을 유영할 때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꼬리로 갈수록 더 가늘어지고, 꼬리지느러미는 거의 없어 은백색 칼날이 바다를 가르는 느낌을 준다. 얼굴에 비해 놀랍도록 큰 눈, 눈 뒤까지 벌어질 만큼 커다란 입은 ‘큰 입 갈치’라는 별명을 낳았다. 아래턱이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송곳니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 드문드문 박혀 있어 바다의 ‘은빛 검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은백색 리본 같은 몸매를 세우고, 머리를 치켜든 채 바닷속을 곧게 서서 유영하는 모습은 갈치만의 독특한 자태다. 등지느러미는 꼬리까지 길게 뻗어 있고, 가슴지느러미는 45도 각도로 날개처럼 퍼져 있다. 어린 시절에는 작은 플랑크톤을 먹지만, 성장하면 오징어와 작은 물고기까지 사냥하는 바다의 은빛 포식자로 변신한다.
■ 뼈를 튼튼히
갈치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지방이 적어 위에 부담 없이 소화가 잘 되는 생선이다.
특히 칼슘과 인이 많아 뼈 건강에 좋고, 노인들의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한 갈치에는 타우린이 들어 있어 피로 회복과 혈액순환을 돕고, 심장을 건강하게 만든다. 옛 제주 어부들은 바닷바람에 지친 몸을 갈치로 회복했다고 한다. 술이 잦던 마을 잔치날엔 갈치국으로 속을 풀고, 아이들 성장기에는 갈치조림으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 갈치는 밥상 위에서 ‘바다의 약초’
치유의 관점에서 보면 갈치는 참 이로운 생선이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지방이 적어 소화에 부담이 없으며, 특히 DHA와 EPA 등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해 두뇌 발달과 혈액순환에 도움을 줍니다. 여성들에게는 빈혈 예방에 좋은 철분이 풍부하고, 칼슘과 인도 함유되어 있어 뼈 건강을 지키는 데 유익합니다. 무엇보다 노화를 방지하고 면역 기능을 강화하는 셀레늄이 많아 항산화 식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갈치 하면 보통 구이·조림·국 정도만 떠올려 국민 밥도둑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좀 특별한 식탁에 갈치를 활용한 독특한 치유의 식탁을 소개하여 본다.
①갈치 튀김
제주의 어촌에서는 ‘갈치튀김’을 어른들의 술안주, 아이들의 간식으로 즐긴다. 입맛까다로운 나도 학교 끝나고 집에오면 부뚜막 위 한쪽에 튀겨둔 갈치 한 토막씩 들고 뛰놀던 기억이 남아있고 지금도 제주의 경조사엔 도톰한 갈치튀김은 거의 상에 오른다.
• 조리법
갈치를 손질해 뼈째 길게 잘라 소금, 후추, 마늘가루로 밑간한다.
얇게 튀김옷(전분과밀가루 혼합)을 입혀 바삭하게 튀긴 후, 레몬즙이나 간장소스, ‘간장-고추냉이 소스’와 곁들이면 일본식 안주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뼈까지 바삭해져 캘슘 보충도 되고, ‘치맥’ 대신 ‘치킨 대신 갈치’라는 느낌으로 젊은 세대에게도 어울리는 맛이라 권해본다.
②갈치 온수스프
고단백 갈치 살과 따뜻한 육수가 만난 한 그릇 요리로, 올여름 뜨거운 바닷바람과 기억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재료 (2인분)
갈치살 200g(살만 발라낸 것), 무 1/4개, 양파 1/2개, 생강 약간, 다시마 육수 500ml
마늘 한 숟갈, 소금·후추 약간, 대파 송송, 채소는 각자 취향대로 준비한다.
•조리 법
무와 양파, 생강을 살짝 볶다가 육수를 붓고 끓인다.
갈치살을 넣고 은은한 불로 10분 끓여 잔뼈와 불순물을 걸러낸다.
마늘과 소금·후추로 간을 맞춘 뒤 대파를 올려 마무리하고, 온수(溫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국물에 갈치의 단맛과 피부처럼 사르르 녹는 식감이 살아 있음을 느꺄보자.
이 수프는 속을 풀어주는 국이 아닌, 마음을 풀어주는 국이다. 국내산 갈치의 고소한 기름이 국물에 스며들어, 몸을 따뜻하게 채우고 심장을 다독이는 한 그릇의 치유가 되길 바란다.
③갈치 주먹밥
예전 제주에선 바다에 나갈 때 갈치를 구워 밥에 싸서 ‘간편식’으로 가져갔다. 이걸 현대식으로 변형하면 ‘갈치 주먹밥’이 될 것이다.
• 재료 (2인분 / 주먹밥 8~10개 기준)
갈치 토막, 2~3토막 (약 150g), 밥 2공기, 간장 1큰술, 참기름 1큰술, 다진 마늘 ½작은술, 마요네즈 1큰술 (선택), 김잘게 썰기 또는 김가루), 통깨 1작은술, 소금·후추 약간
• 조리법
갈치 토막을 깨끗이 손질해 잔가시와 비늘을 제거한 뒤, 소금 한 꼬집을 뿌려 5분간 두어 비린내를 없앤다. 팬에 기름을 아주 조금 두르고, 중약불에서 갈치를 노릇하게 굽는다. 식히면서 뼈를 제거하고 살만 발라낸다. (약 120g 정도 살이 나온다)
작은 팬에 다진 마늘(½작은술)과 참기름(1큰술)을 넣어 살짝 볶는다. 발라낸 갈치살을 넣고 간장(1큰술), 후추 한 꼬집을 넣어 중약불에서 2~3분 볶아
‘갈치 고명’을 만든다.
“제주의 은갈치로 외국인 관광객, 제주 음식 특화 레스토랑에서 관심 가질 만하여 오늘 치유의식탁은 평상시 먹던 생선에 변화를 시도해 보길 바란다.
갈치에 이름을 붙인다면 ‘서민의 끈기’일 것이다. 쉽게 구하고, 쉽게 요리되고, 쉽게 잊히지 않으니까. 갈치는 화려한 생선은 아니다. 하지만 늘 곁에 있었고, 누군가를 위해 매일 아침 주방에 불을 지핀 이들이 가장 많이 꺼낸 생선이기도 하다. 그런 갈치가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앞에 한 번쯤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밥상, 그 속에 담긴 고마움과 치유의 의미를 말이죠. 고된 하루 끝에 내어준 한 조각 갈치조림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바닷바람 맞으며 잡혀온 생선 한 마리에 담긴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자연과 식탁의 정서를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